[IT 동아] 누가 기후기술을 고르는가 [정석희의 기후 에너지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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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대응에서 부족한 것은 흔히 의지와 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더 자주 발목을 잡는 것은 필요한 기술이 아직 없다는 사실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25년 보고서에서 세계가 탄소중립에 이르는 데 필요한 감축량의 약 35%가 아직 상업적 규모에서 실증되지 않은 기술에 달려 있다고 분석한다. 지금 손에 쥔 기술만으로는 목적지에 닿지 못한다는 뜻이다.
출처=AI로 생성한 이미지
출처=AI로 생성한 이미지

그렇다면 그 기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은 아직 누군가의 연구계획서 안에 문장으로만 존재한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익숙한 이름도 없이. 국가가 그 가운데 무엇을 살릴지 정하는 절차를 우리는 심사라고 부른다. 심사는 미래에 쓸 기술을 오늘 고르는 일이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2004년, 나는 과학기술부의 ‘해외 석·박사학위 취득 지원’ 사업에 지원했다. 계획서에 적은 나의 생각은 명확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가 머지않아 거대한 문제가 될 것이고, 많은 전기를 써서 오염물질을 처리하는 하·폐수처리장도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설로 변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생물 연료전지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에 대해 썼고, 그 제안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국가가 투자한 것은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무엇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경험한, 국가가 기술의 미래를 알아본 첫 장면이었다.
그러나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쓰디쓴 장면들도 보게 되었다. 유학 시절, 연구에는 국경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관계에는 한국에서 하던 편 가르기가 따라 들어왔다. 귀국한 뒤에는 면접에서 발표했던 연구 아이디어가 다른 이의 연구기획 안에서 다시 등장하는 일도 겪었다.
교수 부임 후, 한국연구재단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더 근본적인 것을 보았다. 연구내용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를 찾는 일과는 별개로, 신청자와 가까운 사람을 평가자로 이어줄 수 있는 여지가 추천과 배정 과정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학연일 수도 있고 지연일 수도 있으며, 공동연구나 학회에서 자라난 관계일 수도 있다. 이름이 무엇이든, 공적인 연구비의 배분에 사적인 관계망이 개입할 수 있다면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는 구조에 있다.

이름을 가리면 무엇이 보이는가

국내 연구비 심사를 분석한 한 연구는 신청자를 알고 평가했을 때 출신 대학의 위상, 연구경력, 이미 쌓인 학문적 인정 같은 요소가 점수 차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했다. 흥미로운 것은 블라인드 평가에 참여한 평가자 가운데 약 3분의 2가 신청자가 누구인지 맞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구공동체가 좁아서 익명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늘 맞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정한 평가를 개인의 양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제도를 바꿔야 한다. 연구계획서를 먼저 익명으로 평가해 질문의 중요성과 창의성, 과학적 타당성, 성공했을 때의 파급효과를 판단한 뒤, 그 연구를 수행할 역량이 있는지를 별도로 확인하는 것이다. 연구실적으로 제안자를 파악할 수 있으니, 연구계획서와 연구실적을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평가위원 배정은 사람이 추천하는 대신, 제안서와 평가 후보자의 연구성과를 대조해 후보군을 구성한 후, 이해충돌이나 과도한 반복 배정은 데이터베이스로 걸러내면 된다.
제도를 새로 설계할 것도 없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2025년부터 연구자의 평판이 연구의 가치 판단에 끼어드는 것을 줄이겠다며 심사 구조를 바꾸었고, 영국은 학술지 영향력지수로 논문의 가치를 재지 말라고 못 박았다. 국내에도 일부 도전형 사업에 익명 심사가 있지만 그 사업 안에 머문다.
좋은 제도는 이미 있다. 남은 것은 의지다.

35조 원보다 중요한 것

2026년 정부 R&D 예산은 35조 5천억 원으로 전년보다 19.9%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에너지와 탄소중립도 주요 투자분야로 제시됐다. 그러나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총액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35조 원을 쓰면서 미래를 잘못 고르는 나라는, 25조 원을 쓰더라도 제대로 고르는 나라에 추월당한다.
우리가 고대하는 기후기술은 실증되지 않은 어딘가에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익숙한 얼굴로 오지 않는다. 기존 전문가의 눈에 낯설고, 성공 가능성이 낮아 보이며, 때로는 학문의 경계 밖에 서 있다. 그것을 과거의 명성과 익숙한 관계로 걸러낸다면 국가는 미래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되풀이해 지원하는 셈이다.
2004년 국가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한 젊은 연구자의 생각에 투자했다. 국가 연구개발이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그렇게 단순하다. 이미 유명한 사람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유명하지 않은 생각 속에서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다.
글 / 정석희 전남대학교 환경에너지공학과 교수
출처=전남대학교
출처=전남대학교
정석희 박사는 전남대학교 교수이자 에페트솔루션(EFET Solutions) 창업자 겸 CEO로, 미생물 전기화학 시스템 기반 그린 하·폐수처리 및 에너지 전환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국가 장학 지원을 받아 해당 분야의 세계적 연구기관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환경·에너지 분야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3년 연속 스탠퍼드대학교 ‘세계 상위 2% 과학자’ 리스트에 선정되었으며, 학계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기후·에너지 솔루션 개발에 힘쓰고 있다. 현재 기후에너지환경부 산하 광주녹색환경지원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환경보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6년 기후에너지환경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정리 / IT동아 김영우 기자 (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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